백성들이 당신을 왕이라 선언하는 것을 금하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의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셨다. 오늘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였던 군중들이 내일은 당신에게서 돌아설 것이었다. 이기적인 야심이 실망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의 사랑은 증오로, 찬송은 저주로 변할 것이었다. 이것을 알면서도 그분께서는 위기를 피할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세상적 보수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여 나왔던 자에게 그분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섬길 수 있다면 군중들은 그분께 충성을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와 같은 봉사를 받으실 수 없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자들 가운데는 세상적 나라에 대한 희망에서 이끌렸던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자들은 잘못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리떡의 이적에서 가르치신 깊은 영적 교훈은 이해되지 못하였다. 이 교훈은 명백히 드러나야 하였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계시는 그것과 함께 더 심한 시험을 가져올 것이었다. DA 383.1
보리떡의 이적에 대한 소식은 원근에 퍼져서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벳새다로 모여 들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육로로 혹은 바다를 건너 찾아 왔다. 전날 밤에 예수님을 떠나갔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곳에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돌아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건너편으로 실어다 줄 수 있는 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찾으면서 가버나움으로 돌아갔다. DA 383.2
그 동안 그분께서는 불과 하루만에 게네사렛으로 돌아오셨다. 그분께서 상륙하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막 6:55)왔다. DA 384.1
잠시 후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가셨는데 벳새다에서 온 자들이 거기서 그분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에게서 그분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셨는지를 들었다. 격노한 폭풍, 역풍을 거스려 여러 시간을 소용없이 노를 저었던 일, 물위를 걸어오시던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하여 겁내던 일, 그분의 안심시키는 말씀, 베드로의 모험과 그 결과, 태풍이 갑자기 잠잠해지던 일과 배가 뭍에 닿던 일 등이 궁금히 여기는 군중에게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의 주위에 모여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그분 자신의 입을 통하여 이적에 대한 더욱 자상한 설명을 듣고자 하였다. DA 384.2
예수께서는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슬픈 듯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무슨 가치 있는 동기에서 그분을 찾은 것이 아니라 떡을 얻어먹고 배가 부르기 때문에 그분께 붙음으로써 현세의 이익을 좀 더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분부하셨다. 단지 물질적인 유익만을 구하지 말라. 금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을 주된 노력으로 삼지 말고 영적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그 지혜 얻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것을 주실 수 있으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이기 때문이다. DA 384.3
잠깐 동안 청중들의 관심이 일깨워졌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하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많은 괴로운 일들을 실행하여 왔다. 그들은 더 큰 공로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율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듣고자 하였다. 그들의 질문의 뜻은 곧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행할까요?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는 어떤 값을 치러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DA 385.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었다. 하늘의 값은 예수시다. 하늘에 들어가는 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요 1:29)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DA 385.2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행하리라고 예언된 바로 그 사업을 행하셨으나 그들의 이기적인 야심이 상상하던 그런 메시야의 사업을 목격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들을 보리떡으로 단 한 번 먹이셨으나 모세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사십 년간이나 만나로 공급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메시야에게서 더욱 큰 축복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불만스러운 마음은 저희가 목격했던 이적을 예수께서 그렇게 많이 행하실 수 있으신 데도 어찌하여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건강과 힘과 재물을 주고 그들을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키고 능력과 영예를 주어서 그들을 높이실 수가 없을까 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그분의 거절은 오해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 자신이 당신의 사명의 신성한 성격에 대해서 의심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감히 역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불신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으며 사단이 심은 씨는 오해와 배반 가운데서 그와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DA 385.3
이제 한 랍비는 반은 조롱조로 묻기를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하였다. DA 385.4
유대인들은 모세를 만나를 준 자로 공경함으로, 도구에는 찬양을 돌리고 그 일을 성취하신 하나님은 잊어버렸다.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의 거룩한 사명을 의심하고 부인하였다. 이제 동일한 정신으로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기별을 그들에게 전하신 분을 거절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만나를 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 히브리인들을 광야 가운데서 인도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떡으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그 양식은 하늘에서 온 참 떡의 한 표상이었다. 참된 만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주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고 말씀하셨다. DA 385.5
그분의 말씀을 듣는 무리 중 어떤 자는 여전히 예수께서 세상의 양식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줄로 생각하고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DA 386.1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표상은 유대인들이 잘 아는 것이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신 8:3; 렘 15:16)이라고 기록하였다. 랍비들도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영적 의미로 율법을 연구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으며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다 먹여 주실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보리떡의 이적 가운데 있는 깊은 영적 교훈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회당에서 이 교훈을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공개하려고 힘쓰셨다. 그들이 만일 성경을 이해했더라면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 전날에 기진하고 피곤하였던 큰 무리는 그분께서 주신 떡을 먹었던 것이다. 저희가 그 떡을 먹음으로 육체적인 힘과 원기를 회복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에 이르는 영적 힘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부언하셨다. DA 386.2
그들은 성령의 증거와 그들의 심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분의 능력에 대한 산 증거가 날마다 그들 앞에 나타났건만 그들은 여전히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다. 설혹 표적을 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이 이미 보고 들은 것으로도 확신하지 않는다면 더 기이한 이적을 보일지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불신은 언제든지 의심에 대한 변명을 찾을 것이며 가장 확실한 증거라도 논박할 것이다. DA 386.3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이 완고한 심령에 호소하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영접한 자는 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도 잃어버려질 수 없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장래의 생명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한 절망적인 슬픔으로 더 이상 통곡할 필요가 없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DA 386.4
그러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성이 나서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미천한 가문(家門)에 대하여 경멸조로 언급함으로써 편견을 일으키고자 애썼다. 그들은 그분의 생애에 대하여 갈릴리의 노동자요, 그분의 가족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라고 모욕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들은 이 불학무식한 목수의 주장은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분께서 신비로운 탄생을 하셨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분의 태생이 수상하다고 암시함으로써 그분의 탄생의 인간적 환경을 그분의 경력 가운데 한 오점이라고 주장하였다. DA 387.1
예수께서는 당신의 탄생의 오묘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바다를 건너시던 것에 관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에 대한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생애의 특징을 이룬 이적에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원하여 스스로 명성을 거절하고 종의 모양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과 업적은 당신의 품성을 드러냈다. 거룩한 빛에 마음을 연 자는 모두 그분이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요 1:14)심을 깨달았다. DA 387.2
바리새인들의 편견은 저희의 질문이 나타낸 것 이상으로 뿌리가 깊었다. 그 편견은 저희 마음의 강퍅함에 그 뿌리가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그들의 마음에 반항심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품고 있던 정신이 그분의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DA 387.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아버지의 사랑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마음들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므로 그분의 이끄심에 저항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께 나오기를 거절할 것이다. DA 387.4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사 54:13)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성경 말씀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의 교사였다는 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보이셨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인류는 그분의 영광의 계시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배운 자들은 그분의 아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왔으며,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에게서 자연과 계시를 통하여 아버지를 선포하신 그분을 인식할 것이었다. DA 387.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랑하는 요한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교회에 이렇게 선언하셨다.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1, 12)다. 또 예수께서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육체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한 마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 것은 이러한 결합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능력의 나타남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생의 시작이 된다. DA 388.1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가리키면서 마치 그 양식의 공급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이 오셔서 주고자 하는 축복에 비교해 볼 때에 그 선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여 주셨다. 만나는 세상에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뿐 사망의 접근을 방지하거나 죽지 않음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늘의 떡은 영생에 이르도록 영혼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것이다. 구주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 상징에 다른 상징을 첨가하신다. 그분께서는 오직 죽으심으로써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으셨다. 다음 말씀에서 그분은 당신의 죽음을 구원의 방편으로 지적하신다. 그분은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DA 388.2
유대인들은 멸하는 천사가 애굽의 집들을 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밤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경축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유월절 양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그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분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표상 그 자체를 가장 중요시하는 반면에 그 의미는 무시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몸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유월절 봉사에서 상징된 동일한 진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졌다. 그러나 그 진리는 여전히 식별되지 못하였다. DA 388.3
이제 랍비들은 성을 내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마치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라고 물었을 때 하였던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체하였다. 그들은 어느 정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였으나 그것을 기꺼이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곡해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이 그분께 대하여 편견을 품게 되기를 원하였다. DA 389.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징적인 표현을 누그러뜨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히려 더 강력한 말로 그 진리를 반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DA 389.2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흡수해 들임으로써이다. 음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영향을 끼치셔야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그것이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분을 먹고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여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동화되어야 한다. DA 389.3
그러나 이런 상징까지라도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갖는 특권을 나타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기셨으므로 그분의 생애에는 아버지만 나타나셨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분은 당신을 에워싼 악에 의해 더럽힘을 받지 않고 세상 앞에 서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 DA 389.4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가? 그렇다면 영적 생애에 관하여 쓰인 모든 기록은 그대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며, 그대 자신을 예수께 연합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열성은 시들어지고 그대의 처음 사랑은 식어 가는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을 다시 받아들여라.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그대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가 될 것이다. DA 389.5
불신하는 유대인들은 구주의 말씀 가운데서 문자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뜻은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의문의 율법상 피를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성을 모독하는 말로 해석하고 저희끼리 이에 대해서 논란하였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제자들까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DA 390.1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면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DA 390.2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고 사귀를 내어 쫓으신 것은 당신의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다. 그분은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교사들을 통하여 말한 것처럼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므로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말씀 위에 고정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분의 눈에 보이던 임재가 거두어질 때 그 말씀은 그들의 능력의 원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주님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마 4:4)었다. DA 390.3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그리고 모든 영혼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자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중개로 하여 그것을 얻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깊이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한 구절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구절 가운데 넣어 주신 사상을 확인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 때까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DA 390.4
예수께서는 당신의 약속과 경고 가운데서 나를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내가 저를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기도와 약속, 교훈과 경고는 나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이 진리의 원칙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할 때에 그것들은 자신의 일부가 되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심령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상을 형성하고 품성을 발달시킨다. DA 390.5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항상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리고 목마른 백성들에게 가장 귀중한 계시를 나타내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이심을 알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살 때에 그들은 그것이 영이요 생명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 말씀은 본성적이며 세속적인 성정을 멸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나누어 준다. 성령께서는 보혜사로 심령에 임하신다.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제자 안에서 재창조되고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사랑이 증오를 대신하고 마음은 신령한 모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이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는 것이다. DA 39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과의 관계에 관한 신성하고도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품성을 아셨으며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 그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여 그분의 품성과 일치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간직한 야심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하였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예수께 완전히 굴복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요구를 받았다. 만일 그들이 생명의 선물과 하늘의 영광을 받아 누리려고 한다면 그들은 갈바리 사람이 걸어가신 좁은 길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DA 391.2
그 시험은 너무나 컸다. 그분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던 자들의 열정은 식어갔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신 이 설교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제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은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며 또한 그분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다 하여도 지상의 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이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자아 희생의 생애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오묘한 영적 왕국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전에 그분을 찾았던 성실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더 이상 그분을 갈망하지 않았다. 그분께서 만일 당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로마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데 바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었다. DA 391.3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그들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시고,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부언하셨다. 만일 그들이 그분께 이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성령을 향하여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를 그분께서는 원하셨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영혼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심령에 믿음의 불이 켜지기까지는 이 영광은 감추어져 있다. DA 391.4
불신에 대한 공적인 책망을 받음으로 이 제자들은 한층 더 예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심히 불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주를 상심하게 하고 바리새인들의 악의를 만족시키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등지고 멸시하면서 떠나갔다. 그들은 선택하였다. 곧 정신이 없는 형식, 알맹이 없는 껍질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들의 결정은 그 후 다시는 번복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님과 같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DA 392.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마 3:12)리라. 이때는 깨끗하게 하는 시기들 중의 하나였다.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쭉정이는 알곡과 분리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허영심이 많고 독선적이어서 견책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겸비의 생애를 감수하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였으므로 대부분이 예수님에게서 떠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이 제자들이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시험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가 마음속에 들어올 때에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극기의 사업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가 발각될 때 그들은 성을 낸다. 그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투덜거리면서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그들도 성을 내면서 떠나간다. DA 392.2
칭찬과 아첨은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할 것이나 진리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들을 수 없다. 군중이 따르고 무리들을 먹여 주고 또 개선의 함성이 들릴 때는 그들의 음성이 찬양으로 우렁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살피심이 죄를 드러내고 그들에게 그 죄에서 떠나라고 명령할 때 그들은 진리에 등을 돌리고 예수와 더 이상 동행하지 않는다. DA 392.3
이런 불만을 품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섰을 때에 한 다른 정신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한때는 그토록 흥미를 느꼈던 그분에게서 그들은 아무런 매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원수들을 찾아냈으니 이는 그들이 그 원수들의 정신과 사업에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그릇 해석하고 그분의 진술을 위증(僞證)하며 그분의 동기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분을 대적할 수 있는 재료는 무엇이든지 다 수집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이런 거짓 소문으로 말미암아 분노가 크게 격발 되어 그분의 생명은 위태롭게 되었다. DA 392.4
나사렛 예수님이 자기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고백하였다는 소문이 신속히 퍼졌다. 갈릴리에서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감정의 흐름은 일 년 전 유대 지방에서처럼 그분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극히 슬픈 일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권력을 주는 정복자를 원하였으므로 그들의 구주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썩을 양식은 원하였지만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은 원치 않았다. DA 393.1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였던 자들이 생명이요, 인류의 빛이신 당신에게서 떠나는 것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셨다. 그분의 긍휼하심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랑은 보답을 받지 못하며 자비는 무시를 당하고 구원은 거절을 당하였다는 자각이 그분의 마음을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충만하게 하였다. 그분을 슬픔의 사람이 되게 하고 질고를 아는 자가 되게 한 것은 이런 사태들이었다. DA 393.2
예수께서는 당신을 떠나가는 자들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고 열두 제자를 돌아보며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씀하셨다. DA 393.3
베드로는 반문하여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가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부언하였다. DA 393.4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형식주의의 노예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항상 다투었다. 예수님을 떠난다는 것은 율례와 규례를 고집하는 자들과 자신의 영화를 구하는 야심적인 사람들 가운데로 타락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후에 그들의 모든 이전 생애에서보다 더욱 큰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였다. 죄인들의 친구이신 분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사모하여 왔다. 이제 그분이 오셨으니 그분의 임재하심에서 떠나서 그분의 생명을 노리며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박해한 자들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DA 393.5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랑과 자비의 교훈을 떠나서 불신의 흑암과 사악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구주께서 당신의 놀라운 이적을 목도하였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말함으로써 제자된 믿음을 표시하였다. 영혼의 닻을 잃는다는 생각만 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 찼다. 구주를 잃는다는 것은 캄캄하고 폭풍우 치는 바다에 표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DA 393.6
예수께서 하신 많은 말씀과 행동은 유한한 인간의 생각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언행 하나하나에는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업에 있어서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각 언행은 그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행하여진 것이었다. 우리가 만일, 그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중요하며 완전하고 그분의 사명과 일치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DA 393.7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방법은 이해할 수 없으나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든 행동의 기저(基底)가 되는 그분의 크신 사랑을 식별할 수는 있다. 예수께 가까이 나가는 생애를 사는 자는 많은 경건의 오묘를 깨달을 것이다. 그는 품성을 시험하여 그 마음의 목적을 밝히 드러내는, 책망케 하는 자비를 깨달을 것이다. DA 394.1
예수께서 당신의 많은 제자들이 돌아선 원인이 된 시험하는 진리를 제시하셨을 때에 그분은 당신의 말씀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분은 성취하실 자비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시험이 올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하나하나가 심한 시련을 당할 것을 미리 보셨다. 겟세마네에서의 그분의 고뇌, 배신을 당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 등은 그들에게 가장 쓰라린 시련이 될 것이었다. 시험을 미리 주지 않으셨다면 단순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움직이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님이 심판정에서 선고를 받을 때, 그분을 저들의 왕으로 환영하던 군중이 그분을 향하여 노성을 발하고 욕할 때, 조롱하는 군중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고 외칠 때,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세속적인 야심이 실망을 당하였을 때에 이 이기주의자들은 예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포기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가장 애호하던 희망이 소멸됨으로써 슬퍼하고 실망한 제자들에게 가일층 쓰라리고 마음 아픈 슬픔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 어두운 시기에 그분에게서 돌아선 자들의 모본이 다른 사람들까지 데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친히 임재하심으로써 당신의 참된 제자들의 믿음을 여전히 북돋아 줄 수 있을 동안에 이 위기를 일으키셨다. DA 394.2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다 아신 긍휼이 많으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길을 고르게 하셨고, 그들로 가장 극렬한 시험에 대비하게 하셨으며 마지막 시험을 위하여 그들의 힘을 북돋아 주셨다. DA 3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