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죄악적 방종의 해로움을 인정하나 그들의 정욕을 정복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말하기에는 두려운 시인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 2:19). 왜 이러한 연약함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동물적 경향이 활용에 의하여 강화되어서 마침내 보다 고상한 능력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녀들에게 원칙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다. 이는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그들의 선천적 식욕을 만족시켜 왔으므로 그들의 자아를 제어하는 능력이 거의 사라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성의 보다 열등한 정욕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지배적 힘이 되어야 할 것은 타락한 정욕의 종이 되었다. 영혼이 가장 저열한 굴레에 갇히게 되었다. 호색은 거룩함에 대한 욕구를 억눌러 버렸고 영적 번영을 쇠하게 하였다. 1TT 258.1
나의 영혼은 이 타락한 시대에 품성을 형성하고 있는 청년들로 인하여 탄식한다. 나는 그들의 부모를 인하여 전율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반적으로 자녀들을 저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로 가도록 훈련시킬 책임에 대하여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내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유행에 대한 의견이 거론되므로, 자녀들은 곧 이를 인하여 곁길로 가게 되며 타락한다. 그러나, 그들의 방탕한 부모들은 그 자신이 마비되어 있으므로 자녀들의 위험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청년들이 부패한 습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이 과로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에게 육체적인 노동이 크게 면제된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져야 할 짐을 그들 자신이 진다. 과로는 나쁘다. 그러나, 나태의 결과는 더욱 두렵다. 게으름은 부패한 습관에의 방종으로 이끈다. 근면은 유해한 수음 습관의 5분의 1만큼도 몸을 피곤케 하거나 기진하게 하지 않는다. 만일, 단순하고 잘 주선된 노동이 자녀들을 기진하게 한다면, 자녀들에게는 노동 이외에 그들의 신체를 약화시켜서 계속적인 피곤을 느끼게 하는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신경과 근육을 활용시킬 육체적 노동을 자녀들에게 시키라. 그와 같은 노동에 수반하는 피곤함은 악한 습관에 탐닉하고자 하는 그들의 경향을 약화시킬 것이다. 게으름은 저주이다. 그것은 방탕한 습관을 일으킨다. 1TT 258.2
많은 경우가 내 앞에 제시되었으며, 내가 그들의 내면 생활을 보게 될 때에, 나의 영혼은 경건을 공언하며 하늘 나라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부패한 마음가짐을 인하여 역겨워지고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자주 자문하였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누가 이 죄악과 상관이 없는가?” 1TT 2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