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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회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調和)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SC 23.1

    회개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SC 23.2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함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발람은 칼을 빼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바꾸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 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하였다.SC 23.3

    이 고백은 정죄에 대한 무서운 생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 때문에 그의 범죄한 심령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임할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바로가 하나님의 형벌로 재앙을 당할 때에 형벌을 더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것들은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것뿐이요 죄 그 자체를 슬퍼한 것이 아니다. SC 24.1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신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는 양심이 각성되어 죄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과 신성성을 얼마만큼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요 1:9) 심령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암흑 가운데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죄에 대한 자각은 마음과 뜻을 붙들게 된다. 죄인은 여호와의 의를 깨닫고 자기 자신의 죄악과 불결함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속을 살피는 자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성함의 미(美)와 순결의 기쁨을 깨닫고 자기가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된다. SC 24.2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한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회개는 참되고 마음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하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그 기도의 동기가 아니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한지,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깨달아 자기 죄를 미워하였다. 그가 기도한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함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성결의 기쁨-하나님과의 융화와 교통을 회복하는 것-을 갈망하였다. 그의 심경에서 나온 말은 이러하였다.SC 24.3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2.
    SC 25.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SC 25.2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 51:1~14.
    SC 25.3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SC 25.4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실패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저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회개는 저희 죄의 사유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가 죄의 사유보다 먼저 있을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구주의 필요성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만이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회개가 죄인과 구주 사이의 한 장애물이 되어야 할 것인가?SC 26.1

    성경은 죄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려면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아니한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덕이다. 베드로는 다음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한 그의 말 가운데서 이상의 말뜻을 밝히 드러냈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SC 26.2

    그리스도는 모든 옳은 동기의 근원이 되신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진리와 순결에 대한 모든 욕망-우리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은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신다는 증거이다. SC 26.3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신 구주이심을 죄인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SC 26.4

    사람이 혹시 저희가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라도 저희의 죄악적 행실을 부끄러워하여 어떤 악습들을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으로 저희 생애를 개선하려고 힘쓸 때마다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이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감화력이 저들의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외부적 생애가 개선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희 생애의 악함과 저의 심령에 깊이 뿌리박힌 죄가 저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관데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할 것이다. SC 27.1

    죄인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에게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구원의 경륜에 대한 지식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십자가 밑으로 이끌리게 할 것이다. SC 27.2

    천연계의 사물에 작용하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속삭여 사람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찾고자 하는 말할 수 없는 갈망을 생기게 한다. 이 세상 사물은 저희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신은 저희로 하여금 평강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것들 -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결의 기쁨 - 을 찾도록 인도하신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보이는 감화력과 보이지 않는 감화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는 죄악적 쾌락에서 저들이 당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간단없이 일하신다. 이 세상에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려고 헛되이 애쓰는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기별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것이다.SC 28.1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라.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 구세주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 원칙-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었다. 사욕이 없는 사랑과 자선은 그의 심령의 생명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악한 것을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구주를 쳐다볼 때, 즉 구주께로부터 우리에게 빛이 이를 때이다. SC 28.2

    우리는 혹 니고데모와 같이 우리의 생애는 정직하였고 우리의 도덕적 품성은 바르다고 자만하였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우리는 보통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겸비할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애의 모든 행실을 더럽게 한 우리 동기(動機)의 이기적인 것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적의(敵意)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SC 28.3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순결의 빛은 심령을 꿰뚫어 모든 오점(汚點)을 밝히 드러내고 사람의 품성의 결함과 결점을 폭로한다. 또 이 빛은 신성치 못한 욕망과 심지의 불신실과 입술의 불순결함을 명백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함으로 하나님께 불충성한 죄인의 행실이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신의 감찰하시는 감화를 받아 찔림을 받고 통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흠없는 품성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다. SC 29.1

    선지자 다니엘이 자기에게 보냄을 받은 하늘 사자를 두른 그 영광을 보았을 때에 그는 그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혼도(昏倒)되었다. 그는 그 기이한 광경을 봄으로 받은바 영향을 말하기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라고 하였다. 이렇게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의 이기심을 미워하고 그 자애(自愛)의 정신을 가증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품성과 일치되는 마음의 순결을 구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의 의로는(외부적 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6)라고 하였다. SC 29.2

    그러나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외부적 생애에 적용하는 것처럼 율법의 문자대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죄에서 멀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볼 때에 그는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달을 때에 죄는 참으로 흉악하게 보이고 그의 자존심은 사라져 버렸다.SC 29.3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평가할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에도 죄의 등급이 있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악행이라도 하나님의 안목으로는 작은 죄가 아니다. 사람의 판단은 불공평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실상 그대로 헤아리신다. 술부대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 죄가 그를 천국에서 제외(除外)한다는 말을 듣는다. 동시에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오히려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려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특히 미워하시는 바니 대개 이런 죄가 하나님의 품성의 인자와 반대될 뿐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우주의 분위기가 되는 사욕 없는 사랑과도 반대되는 연고이다. 이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자는 오히려 자기의 수치와 부족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교만은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교만은 마음문을 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가 가지고 오신 무한한 축복을 받지 않는다. SC 30.1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고 기도한 가련한 세리는 자신을 심히 큰 죄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그의 죄와 수치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 그의 마음 문은 열려서 하나님의 신이 그 은혜로우신 역사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를 죄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바리새교인의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기도는 그의 마음이 성신의 감화를 막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완전함과 비교하여 그 자신이 더러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으매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SC 30.2

    그대가 자신의 악함을 깨달으면 스스로 개선하기를 지체하지 마라.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만큼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 선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를 돕는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는 누가 좀 더 힘있게 권고해 주기를 기다리지도 말 것이고 좀 더 좋은 기회나 좀 더 좋은 기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그저 그대로 나아갈 것이다. SC 31.1

    그러나 아무든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크시므로 그의 은혜를 저버린 자라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라. 죄가 심히 악하다는 사실은 다만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무 선하셔서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에 저들이 갈바리를 쳐다보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람을 구원할 별다른 방법이 없는 까닭이요 또한 이 희생이 없이는 인류는 죄의 더럽히는 권세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자들과 교제를 회복하기- 인류가 다시 영적 생애를 할 수 있는 자가 되기-불가능한 까닭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다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고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더욱 고상한 생애를 살 소망도 없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SC 31.2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자들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도 저들만큼 선하다. 저들의 행실은 나보다 별로 더 극기하고 단정하고 근신하지 못하다. 저들도 나처럼 오락과 방종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저희 자신을 변명하는 때가 있다. 이와같이 저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저희의 할 의무를 등한히 한 것에 대한 핑계를 삼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이 아무 사람의 핑계도 될 수 없나니 대개 주께서는 허물이 많은 인간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시지 않으셨음이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악한 소행을 비평하는 자들은 더욱 착한 생애와 더욱 고상한 모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하여 그처럼 고상한 개념을 가졌을 것 같으면 그만큼 저희 죄가 더 크지 아니한가? 이는 저희가 어떤 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치 아니한 연고이다. SC 32.1

    지체하는 일을 삼가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 여러 천만 사람이 이 점에 실패를 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여러 말을 않거니와 하나님의 성신의 애소(哀訴)하는 소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택하는 일은 두려운 위험-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위험-이니 과연 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다. 죄는 아무리 작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범하는 때에는 무한한 손실을 받게 될 것을 각오(覺悟)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우리를 극복하고 우리를 멸망케 할 것이다.SC 32.2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 같은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 땅에서는 비탄의 부르짖음이 그치지 아니하고 창조된 만물이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하여 함께 탄식하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 하늘 자체도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그 영향을 받았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에 요구되는 놀라운 희생의 기념물로 서 있다. 우리는 죄를 심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 SC 33.1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그 영향은 그대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신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SC 33.2

    많은 사람은 저희는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저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또는 저희가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경솔히 여길지라도 일후에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희의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은혜의 성신을 거스린 이후에라도 또는 저희의 감화를 사단의 편으로 끼친 이후에라도 어떤 최후적 순간에 저희가 걸어오던 방향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일생 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즉 그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받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SC 33.3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죄악적 방종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신을 강하게 한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심은 바의 수확을 거둘 뿐이다. 온 성경을 통하여 죄인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니”(잠 5:22)라는 솔로몬의 말보다 악을 심상하게 보는 데 대한 더 두려운 경고는 없는 것이다. SC 34.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 SC 34.2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여호와는 기쁨과 슬픔의 착잡(錯雜)한 감정으로 찬 사람의 마음, 더러운 것과 거짓의 거처가 되는 방황하고 제멋대로 나가는 사람의 마음속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동기와 의사와 목적을 아신다. 그대는 더럽힌 그대로의 심정을 가지고 그에게로 나아가라. 시편 기자와 같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자 앞에 그 마음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 하고 부르짖으라. SC 34.3

    많은 사람은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아니하고 지적신앙(知的信仰) 곧 형식적 경건만 받아들인다. 그대들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영혼을 진실되게 취급하라. 그대들의 육신적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추상적 소망은 결국 그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SC 35.1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거룩함의 큰 원칙을 그대들에게 밝히 보여 주나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 준다. 이 말씀을 그대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유의(留意)하라. SC 35.2

    그대들의 죄의 흉악한 것을 볼 때에 또는 그대들이 자신의 진상(眞相)을 볼 때에 실망하지 마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시킬 것이 아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 하셨다. 그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 죄에 빠진 당신의 자녀의 마음을 사려고 하신다. 세상의 부모라도 저희의 자녀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하여 참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시는 자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죄인에게 그보다 더 인정 있게 애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인정 있는 간청이 새어 나온 적이 없다. 그의 모든 허락과 경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SC 35.3

    사단이 그대에게 와서 너는 큰 죄인이라 하거든 그대는 그대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말하라.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은 곧 그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라. 그러나 원수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는 것과 또 그대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빚진 자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적은 금액의 빚을 지고 다른 사람은 매우 많은 금액의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묻기를 어느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할 것이냐 하셨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 하였다. 과연 우리는 큰 죄인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유함을 받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희생의 공로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기에 넉넉하였다. 많이 사유함을 받은 자는 그를 더 많이 사랑할 것이며 그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희생에 대하여 그의 보좌 곁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때이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리운 줄의 길이를 볼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이다.SC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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