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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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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초기 활동

    칼빈은 여전히 파리에서 연구와 명상과 기도로써 장래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진리를 계속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국자들은 그를 화형에 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안전하게 숨어 있었으므로 그의 신변이 그처럼 위험한 줄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들이 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그 때에 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각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 중의 몇 사람이 문에 서서 관리들을 지체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급히 그 개혁자를 창문으로 달아 내렸다. 그는 재빨리 시가를 빠져나갔다. 그는 개혁주의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한 노동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의 의복을 얻어 입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그는 남쪽으로 가서 마가레트 영 (領) 에서 다시금 피난처를 찾았다 (D’Aubigne, b.2, ch.30 참조).GC 223.2

    유력한 친구들의 보호 아래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체류하면서 그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프랑스의 복음화에 있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하는 일없이 지낼 수 없었다. 박해의 폭풍이 잔잔해지자마자 그는 포티어 (Poitiers) 에서 새로운 일터를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복음주의가 호평을 받고 있었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공적인 설교는 하지 못하였지마는 칼빈은 고관의 집에서나 그의 숙소에서나 때로는 공원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얼마 후에 청중이 늘어감에 따라 도시의 밖에서 모이는 것이 더욱 안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깊고 좁은 산골짜기에 있는 동굴을 집회소로 택하였는데, 그 곳은 수목과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적은 무리들을 이루어 각각 다른 길로 시가를 벗어나 이곳으로 모였다. 그는 그 격리된 장소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가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을 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이 작은 교회에서 몇 사람의 충실한 복음 전도자들이 외부로 파견되었다. GC 224.1

    칼빈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한 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희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의 문호가 거의 닫히게 된 것을 알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화형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독일로 가고자 작정하였다. 그가 프랑스에서 몰래 탈출하자마자 심한 폭풍우가 그 나라의 개혁파에게 엄습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GC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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