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한 무류설 (無謬設)
진리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동일한 정신이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원수들을 충동시켜 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경계와 충성이 요구되어 왔다. 그리스도께서 최초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말세에 사는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막 13:37) 고 말씀하신다.GC 56.4
암흑은 점점 더 짙어지는 듯이 보였다. 우상 숭배는 더욱더 보편화되었다. 우상 앞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 가장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풍습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사람들의 정신은 완전히 미신에 사로잡혀서 이성 (理性) 은 그 기능을 잃은 듯하였다. 신부와 주교 자신들이 향락을 즐기고, 육욕적이며 타락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을 지도자로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무지와 악덕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GC 57.1
법왕의 참람된 행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1세기에 법왕 그레고리우스 7세 (Gregory Ⅶ) 는 로마교회가 완전하다고 선포하였다. 그의 주장 중의 하나는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한 번도 그릇된 일을 한 적이 없고, 또 장래에도 잘못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지지해 주는 성경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거만한 법왕은 또한 황제들을 폐위시킬 권세가 자기에게 있노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선포한 선고는 아무도 이를 폐기 (廢棄) 할 수 없지만 자기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결정을 변경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록 7 참조). GC 57.2
절대 무류 (絶對無謬) 를 주장하는 법왕의 포악한 특성을 보여준 현저한 실례는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 (Heinrich Ⅳ) 에게 행한 조치였다. 하인리히는 법왕의 권위를 감히 무시하였기 때문에 파문 (破門) 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폐위의 선고까지 받았다. 하인리히 4세는 법왕의 명령에 의하여 자기를 배반하도록 촉구 받은 자기의 제후 (諸侯) 들의 배척과 협박에 두려움을 느끼고 법왕과 화해해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법왕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자 황후와 충실한 한 시종을 데리고 한겨울에 험한 알프스 산을 넘어갔다. 그리하여 당시 그레고리우스 법왕이 유하고 있는 성에 도착하자 호위병 하나 없이 궁전의 외원 (外苑) 에 이끌려 나가,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몸에는 변변치 못한 옷을 입은 채 맨발로 추위에 떨면서 법왕의 면회가 허락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일 동안의 금식과 자복이 있은 후에야 법왕은 그를 사면하였다. 그것도 왕권을 나타내는 휘장 (徽章) 을 달거나 왕의 권리를 행사하게 될 때에는 먼저 법왕의 윤허 (允許) 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에 그레고리우스는 의기양양하여 군주들의 교만을 꺾어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자랑하였다.GC 57.3
이처럼 오만 불손한 법왕의 태도를 마음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7) 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태도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대조적인가! GC 58.1
세기가 지나갈수록 그릇된 교리가 로마로부터 끊임없이 나왔다. 법왕권이 확립되기 전에 이미 이교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주목을 받았으며, 교회 내에 영향을 미쳐왔다. 개종했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이교적 철학설을 주장하며 스스로 그것을 계속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과 접촉하는 수단이 된다는 구실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자가 있었다. 이리하여 심각한 오류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은 본래 불사 불멸 (不死不滅) 의 본성을 가졌으므로 죽은 후에도 의식 (意識) 이 있다는 설은 그와 같은 오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로마교회가 확립한 성도의 중보, 동정녀 마리아 숭배 같은 것이 다 이러한 교리를 기초로 생겼다. 또한 일찍부터 법왕교 신앙에 통합된 교리로서 끝끝내 믿지 않는 자는 영원토록 고통을 당할 것이란 이단설도 역시 이와 같은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GC 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