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냐, 칼이냐?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평화의 기별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이사야는 메시야의 출생을 예언할 때에 그분을 “평강의 왕” (사 9:6) 이라고 불렀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출생을 목자들에게 선포할 때에 베들레헴 상공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라고 노래하였다. 이 예언적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그 둘은 완전히 일치된다.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친한 형제의 관계를 이루어 준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고 상호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대적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은 그들의 습관과 욕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활 원칙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주는 순결을 증오하며 공의롭고 성결한 복음의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GC 46.3
악인의 손에 의인이 핍박받는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믿음이 연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가져다 준 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몹시 악한 자들은 번영케 하시면서 선하고 순결한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려고까지 한다. 공의롭고 자비하시고 무한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와 같은 불의와 압박을 묵인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여 그분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구주께서는 어두운 시련의 때에 제자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요 15:20)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이 악한 자의 잔인한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보다 더욱 심한 고난을 받으셨다. 혹독한 형벌과 순교를 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GC 47.1